한국에서 도축은 ‘백정’의 일로 천대를 받았지만, 육류가 주식이었던 유럽에서는 사정이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럼에도 서양에서든 한국에서든 도축은 섬세한 기술을 요하는 전문직이다. 육류 소비가 급증한 지금의 한국에서는 더 이상 직업 자체가 천시를 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직업은 ‘죽음’과 항상 함께하고 다른 존재의 생명을 거둔다는 점에서,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는 사회적 시선에 처한다. 고기나 육가공품을 먹는 한 동물이 죽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 죽음을 관장하고 실행해야 한다. 도축과 정육점이 가업인 집안의 소년 베셀이 가업에 갖는 자부심도 바로 이 지점에서다. 그는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할아버지에게 도축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동물을 돌보고 키우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딜레마에 빠진다. 이 사춘기 소년의 인생 고민은, 현재 환경과 생명권을 고민하면서 고기로 식사를 하는 전 세계 현대인들의 고민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키우는 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봤던 친구의 토끼를 직접 도축하는 작업장에서 베셀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해 보이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 위로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스쳐 지나는 듯하다. 그를 보는 관객의 표정 역시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