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칠레 민중의 희망 아옌데 정부의 출범과 쿠데타로 이어지는 좌절 현장을 기록한 기념비적인 4시간 30분 러닝타임의 다큐멘터리 <칠레전투>의 그가 왔다. 30대 초반의 열혈사회주의자 파트리시오 구스만의 활력과 분노로 가득했던 카메라는, 70대가 된 지금, 깊은 성찰과 시적 미학의 카메라로 나이를 더했다. 그러나 그 근저에 깔려있는 분노는 여전하며, 그래도 희망을 전하는 낙관주의에 대한 믿음은 대가의 언어 세계로 완성되었다. 칸영화제 경쟁작의 위엄을 발하며, 유럽아카데미 수상작의 권위가 충분히 느껴질 만큼 경이로운 작품이다. 3천 미터 고도에 위치한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천문학자들이 하늘과 맞닿은 때묻지 않은 사막을 통해 별을 탐구하고, 지구와 우주의 경계를 탐험한다. 이곳의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은 고고학자들로 하여금 수천 년 전의 탐험가, 광부, 그리고 형체가 잘 보존된 미이라의 존재에 대해 호기심을 품게 한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이곳에는 독재자 피노체트에 의해 체포되어 조용히 사라져간 정치범들의 시체도 곳곳에 흩어져 있다. 아름답고 영롱한 우주는 어느덧 칠레의 현대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영화는 혁명을 간절히 염원했던 민초들의 이야기가 된다. 살아남은 그들의 부모와 아이들, 연인들이별과우주, 꿈과 좌절, 과거와 미래를 말한다. 슬픈 이야기들은 경건한 사물들의 이미지, 과거와 현재를 긴밀하게 엮어내는 노련한 편집 미학, 서정적인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숭고하게 펼쳐진다. 다큐멘터리의 아름다움을 오감으로 느끼게 해주는 놀라운 작품이다. (정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