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사이에 살았던 야생토끼들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 베를린 장벽은 사실 하나의 벽이 아니라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에 각각 위치한 두 개의 장벽이며, 두 벽 사이에는 120km의 공간이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지역’이라고 알려진 이 공간은 야생토끼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는데, 인간의 침입이 없고, 삼엄한 경비 속에 보존되어 있는데다, 먹을 것도 풍부했기 때문이다. 동서독 분단의 28년은 인간들에게는 적대감과 불안의 시대였지만 장벽 사이에 사는 토끼들에게는 그야말로 평화의 시대였다. 그러나 어느 날, 장벽이 무너지고 토끼들은 냉혹한 현실에 던져진다. 서베를린 지역으로 이주한 토끼들은 무리지어 살아가며, ‘자유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애쓴다.<베를린의 토끼>는 지난 50년간의 동유럽 역사를 재치 넘치는 은유로 전달하며, 자유와 안전을 동시에 갈망하는 동유럽인들의 모순을 ‘토끼’라는 소재를 통해 우화적으로 펼쳐낸다. 베를린 장벽 사이에서 살아가는 토끼들은 국가의 감시와 보호 속에 단순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유지하기 바랐던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의 국민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에게 있어 사회주의체제의 몰락과 함께 새롭게 맞이한 자유시장주의라는 현실은 쉽지 않는 도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