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면 거대한 트럭 한 대와 그 뒤를 따르는 몇 대의 자동차가 아주 천천히 카메라 쪽으로 다가온다. 마치 비현실적인 장면처럼 느끼게 만드는 운구 행렬의 그 느린 속도는 그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잔인했던 실제 사건 때문에 촉발된 것이다. 1995년 7월, 내전 중이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접경도시 스레브레니차(Srebrenica)에서 무려 8,37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학살의 진상이 밝혀지는 데에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5년이 되어서야 발굴된 유해들의 제대로 된 매장이 이루어진다.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자 했던 그 행사로부터 <비극이 잠든 땅>은 과거를 더듬고, 살아남은 이들의 현재를 마주하는 여정에 오른다. 형언하기도 힘든 사건을 겪은 이들의 삶을 담았지만, 영화는 격정과 분노의 나열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과한 이들의 침묵과 그들이 딛고 사는 자연의 강인함을 신중하게 병치한다. 함께 제시되는 아카이브 이미지들은 그 고요함의 무게를 더한다.
쿰야나 노바코바
기예르모 카레라스-칸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방기(Bangui)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왜 현재의 자신들이 빈곤한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지, 그리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물론 그 답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자신들이 결코 선택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결정하는 모국(母國)의 부패와 무능이 그 이유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자신과 친구들의 솔직한 일상을 카메라에 담으며, 외부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내밀하게 개인에게 틈입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나의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꿈꾸기 힘든 상황을 쉽사리 내 탓으로 돌리지 않으며 이 수렁에서 벗어날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한다. 현재의 청년 세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낯선 풍경 속에서도 충분히 지금,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외치고 있다.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세대일지라도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라고.
라피키 파리알라
차별을 편 가르기 정도로 단순화하는 것은 그 극단에 무엇까지가 놓일 수 있는지를 눈 감는 일이다. 누군가는 차별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 단순화 속에서 쉽게 사라지는 탓이다. 미얀마의 소수 민족인 로힝야족의 삶은 차별과 배제의 위험성을 잔인할 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로힝야족은 이슬람교도들로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있으며,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 작품은 그들을 향한 공격이 얼마나 일상적인 것인지를 천천히 훑어간다. 그들을 혐오하는 이들이 놓은 불길이나 제대로 된 의료혜택을 앗아가는 것은 결국 그들의 죽음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 공포 속에서 함께 헤쳐가는 두 여성은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어도 누군가가 쉽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하지만 (그곳에서는) 위험한 사실을 굳게 믿는다. 그들의 도전은 누군가를 살리면서 또 누군가를 부끄럽게 하는 처절한 손짓이다.
스노우 흐닌 아이 흘라잉
입춘, 우수, 경칩…. <씨앗의 시간>은 사계절도 충분히 누리기 어려운 현대인들을 촘촘한 24절기로 끌고 가는 영화다. 여기에는 수십 년간 자신의 씨앗을 받고 심어온 윤규상, 장귀덕 두 농부와 이들의 노동이 지켜온 토종 씨앗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땅에 가까워진 몸으로 농사를 짓는 늙은 농부들, 이들에게서 받은 토종 씨앗을 심는 젊은 농부들, 그리고 제비콩과 호박씨, 새들의 소리를 분간하는 감각, 얼었다 녹는 땅의 풍경을 카메라는 가만히 지켜본다. 종종 농부들 뒤로 KTX가 빠르게 지나가고 초고층 아파트가 지어지는데, 이는 윤균상, 장귀덕의 노동을 지켜보는 것이 곧 “한 시대의 마지막을 보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조용히 호소하는 듯하다. 영화의 말미에 농부가 아닌 씨앗이, 운동하는 존재로서, 사라지지 않고 끝내 살아남으려는 씨앗이 진정 영화의 시간을 이끌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다. 말 그대로 ‘씨앗의 시간’. <씨앗의 시간>은 이 소중한 자연의 감각을 회복하려는 영화다.
설경숙
기숙사는 언제나 밤처럼 어둡다. 3교대 근무로 인해 늘 누군가는 자고 있기 때문이다. <여공들의 기숙사>는 어두컴컴한 기숙사를 배경으로 베트남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는다. 그런데 이 기숙사는 좀 이상하다. 전체적으론 잡동사니로 만든 동굴 같고, 중앙에는 괴이한 생명체 비슷한 것도 있다. 이곳에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과 고된 생활에 관해 이야기하며 파업을 준비한다. 정확히는 그런 내용의 퍼포먼스를 벌인다. 그들은 대사를 연습하고 상황을 재현한다. 하지만 이 퍼포먼스의 목적이 그럴듯한 연극을 만드는 데 있지는 않아 보인다. 기숙사는 멀끔한 연극 무대가 아니라, 개별적인 대화, 일상적인 몸짓, 엇갈리는 시선, 터져 나오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공동의 공간이다. 이주노동자 워크숍을 통해 만들어진 영화로, 후반부의 쏟아지는 빛이 깊은 감흥을 남긴다.
소요헨
1996년,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가 오픈한다. 2019년 재개업 한 이곳을 운영하는 ‘명우’는 코로나 위기에 맞서 힘겹게 레스보스를 지키고 있다. 영화는 재연영상과 인터뷰를 통해 레스보스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던 세 공간을 반추한다. 1970년대 레즈비언들은 명동에 있었던 여성 전용 다방 ‘샤넬’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시간이 지난 2000년대 초반, 10대 레즈비언들은 ‘신촌공원’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명우는 ‘샤넬’의 손님으로, 그리고 ‘신촌공원’ 건너편 바 ‘레스보스’를 운영하는 주인으로 70년대부터 현재까지 레즈비언 전용 공간의 곡절을 체험한 장본인이다. 시대와 장소는 달라도, 방문객들은 이러한 공간을 공히 마음이 편하고 안전한 곳으로, 그리고 정체성을 형성하게 해준 소중한 해방구로 기억하고 있다. <홈그라운드>는 시대를 뛰어넘은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필요성과 자생력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영화다.
권아람
100명이 넘는 사람이 대강당에 모여 있다. 이윽고 군사재판이 시작된다. 어떤 죄로 재판을 받는지 설명도 듣지 못했고, 변론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피고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고 이들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진다. 육지에 있는 형무소에 도착해서야 자신의 형량을 알게 된 사람들은, 수감생활이 끝난 뒤에도 합당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카프카의 『소송』보다 더 부조리한 도입부지만 이것은 소설이 아닌 현실이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4.3에 휘말려 침묵을 지켜야 했던 다섯 명의 할머니가 증언하는 과정을 차분히 따라간다. 제주도의 파도 치는 해변과 아름다운 설산이 증언 위에 겹쳐지는 가운데, 때로는 증언과 맞아떨어지는 장소가 제시되기도 한다. 평범한 골목, 집의 앞마당, 불에 타 폐허가 된 집의 잔해. 이들은 자료화면이 아닌 일상적 풍경으로 다가오면서도, 역사적 더께가 덧씌워진 목격자로서 관객들을 지켜보기도 한다. 이 단순한 구성방식은 영화가 4.3의 핵심에 접근하는 세심한 방법론 그 자체를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김경만
필름의 손상이 자연재해에 기인한다면 기억의 손상은 억압된 역사에 기인하기에 이 둘의 복원 작업은 질적으로 다르겠으나, 필름의 손상으로 인해 왜곡된 이미지가 사회적 기억을 환기하고 필름의 내용이 역사적 기억의 위상에 아이러니를 만든다. 수해를 입고 붙은 사진을 분리하기 위해 물에 넣으면 복원은커녕 이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더 녹아버릴 수도 있기에, 붙어버린 사진 그대로를 투명도만 높여서 스캔하는 방법도 제시된다. 1980년대 투쟁 현장을 찍던 이들의 인터뷰, 참세상 아카이브에 있는 2000년대 비정규직화 반대 투쟁 동영상, 작가가 촬영한 장면들은 훼손을 각오한 각각의 모습으로 도달한다. 그러나 이들은 마치 서로 붙은 채로 투명도가 높아진 사진처럼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되기도 한다. 엔딩크레딧의 카운트다운이 0을 가리키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생산된 위계, 그 실패한 시간의 기억이 종료되어 우리는 그 실패에 더 이상 잠길 수 없다. 영화의 종료를 향해 가는 카운트다운은 단호하게 우리를 시작의 시각으로 데려간다.
홍진훤
이일하
1996년,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가 오픈한다. 2019년 재개업 한 이곳을 운영하는 ‘명우’는 코로나 위기에 맞서 힘겹게 레스보스를 지키고 있다. 영화는 재연영상과 인터뷰를 통해 레스보스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던 세 공간을 반추한다. 1970년대 레즈비언들은 명동에 있었던 여성 전용 다방 ‘샤넬’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시간이 지난 2000년대 초반, 10대 레즈비언들은 ‘신촌공원’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명우는 ‘샤넬’의 손님으로, 그리고 ‘신촌공원’ 건너편 바 ‘레스보스’를 운영하는 주인으로 70년대부터 현재까지 레즈비언 전용 공간의 곡절을 체험한 장본인이다. 시대와 장소는 달라도, 방문객들은 이러한 공간을 공히 마음이 편하고 안전한 곳으로, 그리고 정체성을 형성하게 해준 소중한 해방구로 기억하고 있다. <홈그라운드>는 시대를 뛰어넘은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필요성과 자생력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영화다.
권아람
박윤성 감독은 본인이 겪은 양육비 미지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고민을 하기도 하고, 본인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금 더 적극적인 방법들을 찾아보지만, 무언가를 알아갈수록 해결하기 어려운 여러 복잡한 여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감독은 양육비 미지급에 관한 개인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용기 있게 표현해내며, 이를 사회적 담론으로 넓게 확장시킨다. 감독은 이 영화를 어린 시절 쓰던 편지처럼 고이 적어 세상으로 보낸다.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본인만의 양식을 통해 세상에 편지를 보낸 박윤성 감독이 과연 누구로부터 어떤 답장을 받게 될지 기대하고 응원하게 된다.
박윤성
2030년이면 사라지게 될 예정이라는 무궁화호의 소식을 전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무궁화호와 승객들, 그리고 무궁화호에 비친 풍경들을 담은 영화는 감독과 친구들의 대화를 배경 삼아 진행된다. 무궁화호와 처음 만났던 기억들, 무궁화호와 관련된 추억들, 그리고 무궁화호의 자세한 외관과 노선에 따른 각각의 풍경들에 대해서도 들려준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어느새 무궁화호에 담겼던 각자만의 애틋한 기억과 추억들이 떠오르게 된다. 모든 것이 빠르고 획일화되는, 영화에서 말하는 ‘낭만’이 사라지는 시대에 감독과 친구들은 이 낭만을 잃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빠른 것만이 최고로 여겨지는 세상 속에서 당신만의 속도와 감성은 무엇인지 영화는 무궁화호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에둘러 묻는다.
한진섭
감독은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벡델 테스트”에 대해 질문하고 다양한 데이터와 자료들을 통해 “벡델 테스트”의 뜻과 사회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상, 성차별에 대한 성찰적 논의를 전개한다. 이 작품은 대화체의 형식을 가져와 비대면 상황에서의 이야기를 만드는 독창적인 방식을 채택한다. 감독은 생소한 용어에 대한 궁금증의 유발을 통해 주제에 대한 호기심과 동기유발의 과정만으로 계속적인 영상에 대한 몰입으로 이끈다. ‘벡델 테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감독은 일상 속에서 제기될 수 있는 사회의 문제 상황에 대해 ‘영화’라는 대중적인 관심이 담긴 소재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관심을 이끌면서도 ‘성평등’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지속적인 논의의 중심으로 안내한다.
민주홍
경남 산청에 있는 기숙형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감독은 ‘덕질’을 주제로 3학년 친구들에게 인터뷰를 하여 덕질의 방법이나 덕질을 하면서 얻는 것, 덕질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 덕질과 학생들의 삶의 모습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다. 실상 학생들의 팬덤문화와 유사한 작품은 이전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주제이지만 이 작품은 인간의 욕구와 욕망, 행복 추구 등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고 기숙형 학교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결핍의 문제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비록 작품의 후반부가 다소 매끄럽지 못하고 핵심 주제를 부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나 이 작품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공간 속에서의 삶과 앎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인상적이었고 대한민국의 고3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박소은
자신의 어머니를 슈퍼우먼으로 빗대어 표현한 이 영화는 제사라는 문화 속에서 감독 본인의 어머니가 겪고 있는 어려운 지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제사는 칼같이 지켜야 한다고 말하던 할아버지는 촬영이 시작되자 제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말이 바뀐다. 이러한 할아버지와 제사를 묵묵히 준비하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엄마와 할아버지에게 며느리의 역할과 제사의 의미에 대해 번갈아 묻던 감독의 목소리는 중간쯤 사라지고, 제사의 풍경을 오랜 시간 동안 보여준다. 조용히 제사 음식을 먹고 있는 남성들과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여야 하는 여성들의 모습들,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음식과 제사라는 문화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만든다.
백지윤
제작진은 곤충을 먹지 않는 원인인 부정적 인식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식용곤충 농장의 대표, 식용곤충 연구가, 곤충요리 전문가와 인터뷰를 통해 사육, 수요, 위생 식용곤충의 장점, 안전성, 전망 등에 대해 살펴보고 부정적 인식을 불식하는 곤충쿠키 실험 등을 진행한다. 이 작품은 전문적인 기초자료 조사와 더불어 다양한 인터뷰 내용과 영상의 앞뒤에 배치한 실험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작품 제작을 위한 푸티지와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또한,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자세와 주제를 관통하는 진지한 참여자세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큐멘터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를 적절한 장치를 설정하여 다양한 방향에서 설득적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원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