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한국다큐멘터리상 <망각과 기억2 : 돌아 봄>

2017.10.27

멀어지는 거리, 흐르는 시간 속의 인내:
<망각과 기억2: 돌아 봄>(4. 16 연대 미디어위원회)

권세미 콘텐츠교육지원팀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나’라는 개인이 ‘세월호’라는 화두를 지금껏 얼마나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그로부터 도피해왔는지 밝히고자 한다. 3주기를 지나 어느새 반년을 또 넘어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476명의 승객을 태운 대형 여객선이 서해 한가운데 침몰한다는 뉴스 보도에 눈을 떼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하지만 뇌리 한 켠으로 그 엄청난 사건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었던 방어기제가 존재했다. 바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는 믿음이었다. 그 사이에 배에 탑승한 단원고 학생 전원이 구조됐다는 오보가 속보로 뜨기 무섭게 정정됐으며, 에어포켓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 잇따랐다. 사건이 발생한 지 나흘 뒤, 교회에 갔다. 목사는 세월호를 위해 기도하자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배 안에 남아있는 탑승자들이 더 이상 생존해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뉴스를 언급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 이후로 나는 세월호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어떤 애도의 태도도 취하지 않았고 해당 사건이 화두가 될 때마다 애써 대화를 피했다. 이런 모습들이 나를 세월호에 무심한, 소위 세월호를 지겨워하는, 이 참사를 삶 바깥으로 밀어내고자 하는 제3자로 보이기에 충분하다 해도 반박의 여지가 없다. 아직도 스스로 정의하지 못할 뿐더러 지금껏 언급을 회피하는 가운데 <망각과 기억2 : 돌아 봄>(4. 16 연대 미디어위원회)을 마주하기 위해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여기서 이 영화가 건넨 인상을 통해 처음으로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다섯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망각과 기억2 : 돌아 봄>(이하 ‘망각과 기억2’)은 세월호 사건을 둘러싸고 직간접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인물들을 조명한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그 거리가 간접적인 관계로 멀어진다기보다 확장된다는 표현이 보다 적합하다. 2부로 나눠지기도 하는 위 영화의 1부에 해당하는 <승선>(안창규)과 <잠수사>(박종필)는 각각 사건의 물리적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두 인물을 주목한다. <승선>은 세월호 사건 당시 배에서 마지막으로 구조된 생존자 김성묵을 인터뷰하며, <잠수사>는 선체에 진입해 희생자 시신을 수습한 민간 잠수사 故 김관홍의 분노를 경청한다. 김성묵은 구조 과정에서 수량 부족으로 친구에게 건네는 바람에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학생과 나눈 대화를 되새기며, 故 김관홍은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은 선체 안에서 희생자들의 흔적을 마주하며 숨을 쉰다. 금방이라도 다시 걸칠 수 있을 것 같은 희생자들의 운동화와 옷가지의 온전한 상태는 수압이 높아져 시신의 상태가 망가지기 전에 보다 온전한 형태로 유해를 유가족에게 돌려보내고픈 김관홍 잠수사의 바람을 상기시킨다. 사건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김성묵과 故 김관홍은 다른 선택을 내린다. 일상으로 돌아온 김성묵은 가장 먼저 결혼을 했으며, 약을 먹고 일에 몰두하고자 했다. 세월호로부터 멀어지려 했지만 그는 결국 광장으로 나가 고통을 인정하고 공유하기로 결심한다. 한편, 故 김관홍은 시신 수습 전후로 그를 옥죄는 상황의 연속 가운데 가슴을 치는 고통 끝에 생을 마감했다. 두 사람은 세월호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선택의 두 가지 방향을 보여준다.

생존자와 사후 처리에 참여한 잠수사, 두 사람 사이에 흘러간 시간이 존재한다. 구명조끼를 입지 못한 학생은 잠수사에 의해 수습됐거나 아직도 수습을 기다리는 시신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은 망연한 것이 아닌 결국 돌이킬 수도, 씻어낼 수도 없는 자국을 남긴다. <망각과 기억2>는 다음 편으로 이어질 때마다 이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게끔 만든다. 세월호 사건은 사건의 직접 관계자뿐만 아니라 보도를 통해 사건을 접한 제3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2부에 속하는 <세월오적五賊>(김환태), <걸음을 멈추고>(김태일, 주로미), <기억의 손길>(문성준)은 세월호 유가족을 중심으로 이들과 연대하는 목소리와 움직임을 주목한다. 이 단편에서 주된 인터뷰 대상은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어린 자녀를 잃은 부모들이다. 1:1 인터뷰 화면 속의 부모들은 일상과 생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월호 사건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대책위를 수립하기도 하고 연극 치료를 통해 상실을 이겨내고자 한다. <세월오적五賊>은 <잠수사>에서 김관홍 잠수사가 상식과 논리의 범주에서 이해할 수 없다고 개탄한 분노의 대상을 힘껏 저격한다. 하지만 내레이터의 신명난 풍자보다도 이 단편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스피노자의 “억압 불가능한 최소”를 드러내는 저항의 실천 주체로서 개인의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스피노자가 주장한 폭력의 현상학에 따라 극단적 폭력의 절대적 지배에 반대했다.[주1]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인파는 세월호 이후의 시간을 방기한, 또 다른 극단적 국가폭력이 야기한 “억압 불가능한 최소”의 연대를 증명한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에 따라 구축되는 건 연대의 형성만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쌓이는 망각의 힘이다. 세월호를 둘러싼 전국민적 애도는 마치 기한이 다했다는 듯 또 다른 집단의 이해와 맞붙는 경우에 이르렀다. <망각과 기억2>의 각 단편에서 인물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관점을 비교해도 망각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단편 <승선>에서 김성묵이 사건 당시의 일화를 술회할 때, 닫힌 공간의 정적 가운데 그의 목소리만이 울린다. 화면 안의 모든 조건이 그를 주목하고 증언의 무게를 감당하고자 한다. 하지만 극 중 마지막 단편인 <기억의 손길>에서 안산시 세월호 추모공원 건립 여부를 두고 개최된 대토론회에서 유가족들은 이제 추모공원 설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발언 혹은 악다구니 속에서 입을 다물고 있다. 1:1 인터뷰 화면에서 벗어나 토론회장 구석과 뒤쪽에 앉아있는 유가족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그들은 이기적인가? 정말 세월호 사건은 유가족을 비롯한 직접 관계자가 아니고서는 개인의 삶에서 밀어내고픈 일방적 애도의 강요인가? 앞서 다섯 편의 단편이 뒤로 갈수록 사건과 맺는 인물과 환경의 관계가 간접적이고 멀어진다고 밝혔다. 사건은 잊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의 싸움은 더 이상 한순간에 잃은 자녀를 다시 품에 안기 위함이 아니다. <기억의 손길>에서 한 유가족은 아이를 되찾을 수 없다면 아이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망각과 기억2>에서 다섯 개 단편의 배열은 망각의 진행 속에 놓여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두고 필사적으로 강변한다. 세월호 사건의 영향은 점차 확장되고 있다. 수학여행을 떠난 자녀를 뒤로 하고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갔던 부모들은 이제 개인의 삶에 머물지 않고 연대하고자 하며, 공동체를 구성하고 또 다른 커다란 힘에 맞서 세월호를 기억하고자 한다. 국가폭력이 아닌 또 다른 커다란 힘이라 한다면 그것은 망각의 불가항력이다. 세월호로부터 도피하고자 했던 관객으로서 다시 내게 물어본다. 나는 왜 세월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왜 애써 세월호를 외면하려 했는가? 어떻게 보면 지금껏 세월호와 맺는 직접적인 관계, 물리적 환경만을 신경 썼는지도 모른다. 생존자와 유가족이 아닌 TV로만 사건을 지켜보는 무기력한 제3자의 상황에서 어떤 슬픔을 쏟아내도 이해할 수도, 가늠할 수 없는 비극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석될 제3자의 일시적인 애도가 두려웠다. <망각과 기억2>은 망각의 진행을 받아들이되, 세월호 사건이 개인에게서 이끌어낸 집합적 연대의 가능성과 실천을 주목한다. 내게도 그런 가능성이 있는지 아직 자신은 없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이 영화를 넘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겨운 화두라는 표현이 오가는 건 3년 전의 사건보다도 비극적인 일이다. 멀어질 수 있다, 희미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기억되길 바란다, 계속 회자되며 누군가 외로운 싸움을 지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한다.


[주1] 「폭력과 시민다움 : 정치적 인간학의 한계에 대하여」,『폭력과 시민다움 : 반폭력의 정치를 위하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난장, pp. 118 ~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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