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현장기록] 사적다큐: 개념의 재전유와 현재의 흐름

2017.10.26

사적다큐: 개념의 재전유와 현재의 흐름

  • 일시 : 2017년 9월 26일
  • 장소 : 메가박스 백석 컴포트 6관
  • 패널 : 윤가현(다큐멘터리 감독), 정수은(다큐멘터리 감독), 김숙현(다큐멘터리 감독), 황미요조(영화평론가), 변성찬(영화평론가) (왼쪽부터 앉은 순서대로)
  • 공동주최 : 두영찍(두번째 영화 찍을수 있을까)
  • 기록 : 도상희 시민에디터

정수은 안녕하세요. 포럼의 진행을 맡게된 정수은입니다. 오늘 제작자 그리고 비평쪽의 입장에서 사적다큐에 대한 여러 가지 지점을 읽어보는 자리를 마련했고요. 저의 발제로 포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작년에 저는 첫 장편으로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그 날>(One Warm Spring Day , 2016)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할아버지의 역사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할아버지에 대한 저의 기억과 그리움으로 완성이 된 영화입니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고 영화 속에서 내내 맴도는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엄마의 죄책감은 현실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저의 주변을 둘러싼 저의 세계를 영화 안에서 견고하게 만들어가고자 하는, 저의 세상을 탐구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자입니다. 저의 작업은 종종 ‘사적다큐멘터리’라 불리기 때문에, 그 말의 무게 안에 작업이 갇히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 날>이란 작업을 하면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는데요. “너의 할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셨으니까 네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지, 아이템을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느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습니다. 이 또한 사적다큐멘터리가 주변에서 손쉽게 아이템을 획득해서, 또다시 손쉽게 작업한다는 편협한 생각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단지 사적 다큐멘터리 작업 때문에 들었던 말인지, 아니면 제가 신진 그리고 여성 작가라는 저의 위치에서 비롯한 문제였는지, 혹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문제였는지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사적다큐멘터리에 대한 비판과 담론들이 함께 이야기 되거나 나누어지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그 안에서 켜켜이 쌓이는 모습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적다큐멘터리란 무엇일까. 내가 만드는 것은 사적다큐멘터리인가. 왜 여성이 만드는 작업들에 유독 사적다큐멘터리란 이름이 붙는 것일까. 왜 그 이름표에는 쉽게 표현되지는 않지만 어떤 불편한 시선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것은 과연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문제인 것일까, 아니면 신진과 여성이라는 존재, 권력에 대한 문제인 것일까? 다큐멘터리에서 ‘사적’이란 것은 무엇이며 사적과 공적의 영역은 누구에 의해서 기준이 정해지는 것일까. 또 그 의미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이런 꼬리를 무는 질문들 속에서 저는 저와, 제 주변에서 함께 작업을 하는 여성감독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작업은 사적다큐가 아니라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이런 논의가 이미 지나간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며 사적다큐멘터리란 단어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오히려 사적다큐멘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의 힘을 재전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여성신진감독들은 첫 번째 포럼으로 지난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두영찍’,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 (이하 두영찍)이라는 포럼을 열었고 그 자리에서 저는 ‘우리가 말하는 우리의 영화’라는 제목으로 사적다큐멘터리에 관련된 발제를 했습니다. 당시 발제로는 사적다큐멘터리에 대한 범람은 우려하지만, 작품들에 대한 비평은 거의 없는 다큐 씬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적다큐멘터리라 불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 작업자들 스스로 우리들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라는 것이 그 취지였습니다. 발제의 주 내용은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발제문의 요약문처럼 우리가 만드는 영화가 거시적인 이야기로 나아가지 못한 불완전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언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포럼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갔었는데요. 특히나 첫 작업을 하고 난 뒤에 다음 작업을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여성 감독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사적다큐멘터리의 경우에는 제작지원을 받기 힘들기 때문에 제작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또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서 작업에 대한 지나친 멘토링으로 다음 작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었습니다. 단순히 신진 혹은 여성 감독들이 사적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겪는 어려움들이 사적다큐멘터리 자체를 바라보는 편견이나 시선의 문제만은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데 피칭 제도나 멘토링 프로그램들을 거치면서 사적다큐멘터리 작업자들 특히나 신진작업자들의 작업영역은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고민들이 있던 와중에 이번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포럼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사적다큐멘터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적다큐멘터리의 정의가 어렵다기 보다는, 사적다큐멘터리가 다큐멘터리 씬 안에서 어떤 의미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작업자들 사이에서의 담론들뿐만 아니라 비평의 영역까지도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 영화제나 피칭과 같은 제작지원, 멘토링 프로그램 등의 과정에서 들었던 사적다큐멘터리에 대한 지나친 편견이나 폄하의 언어들과 인식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고 또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또 언어를 공유하고 함께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하게 되었습니다. 언어를 점유할 것인가, 폐기할 것인가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사적다큐멘터리의 언어를 재전유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적다큐멘터리가 가지고 있는 힘과 미학적 가치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되어 왔던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현재 그 의미를 재발견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언어를 말랑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지금 우리가 해야할 것은 그동안 부재했던 소통의 언어를 갖는 것입니다. 이 포럼을 준비하면서 앞에 계신 패널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적다큐멘터리를 바라보는 결이 다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작자의 입장과 비평의 입장, 또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쓸 수밖에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도 확인하게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 자리에서 사적다큐멘터리가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할 순 없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갖게 되었습니다. 사적다큐멘터리 개념에 대한 환기와 현재의 흐름을 확인해보고 또 제작자 입장에서 사적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통해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생산되고 사유되는 발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여는 글을 마칩니다.

윤가현 저는 <가현이들>(The Part-Time Workers’ Union , 2016)이라는 아르바이트 노동조합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저도 수은감독님과 발제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에 짧게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사실 <가현이들>이 사적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영화를 준비하면서 사적다큐라는 단어가 귀에 다가왔을 때에는, 그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이는 것을 보면서 ‘아 그럼 내 영화는 사적다큐인가?’ 물어보기 시작했어요. 제 영화에는 어쨌든 저의 나레이션과 저의 일상이 들어가고 저와 같은 가현이들이 셀프카메라를 찍지만 그것을 편집해서 알바노동자들의 이야기로 문제를 확장했기 때문에 저는 이것을 사적다큐로 생각하고 만든 적이 없었는데요. 어쨌든 간에 다큐멘터리가 점점 많이 만들어지고 있잖아요. 어떤 분이 술자리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이번에 사적다큐멘터리가 너무 많았어.” 제가 예전에 피칭을 했던 곳에서는 한 집행위원께서 “아 왜 이렇게 다들 사적다큐만 찍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의문이 들었어요. 저는 분명 소개할 때 아르바이트 노동조합에 대한 영화를 찍고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왜 나에게 ‘사적다큐’라고 이야기하는지.. 그것은 나쁜 다큐멘터리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죠. 수은 감독님과 두영찍을 준비하다가 이야기 한 것이, “아니 문정현 감독님 영화를 두고는 사적다큐라고 말하지 않는데, 왜 자꾸 우리한테는 사적다큐라는 그 단어를 자꾸 쓰는 건지 모르겠다. 이건 명백하게 성적으로 차별되게 쓰이는 단어가 아니냐.” 이런 문제제기를 시작으로 그런 이야기까지 두영찍에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에는 이게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거죠.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된 단편 세 개의 작품, <페미니스트 휴머니스트>(Feminist and Humanist , 2017)와 <여자답게 싸워라>(Fight like a Girl , 2017)라든지 저는 굉장히 재미있고 좋았거든요. 저는 그래요. 어떤 사람의 눈에는 사회적인 이야기, 어떤 평화나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멋있어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그런(위의 세 개 단편)이야기들이 작은 이야기라기보다는 더 친근하고, 공감하고, 더 이야기를 쉽게 던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방법을 버리고 뭔가 새로운 방법을 선택해야지만 제작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거라면, 내가 두 번째 영화를 과연 찍을 수 있을까? 라는게 가장 큰 고민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래서 사실 두 번째 영화의 기획안을 쓰고 이야기를 들을 때에 피드백 중에서 ‘이번에는 <가현이들>처럼 찍지 마’ 라는 이야기가 가끔은 저 스스로에게, 그런 풍의 영화를 찍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런 쉬운 방식으로, 작은 이야기를 그렇게 찍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하고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이 사적다큐라는 단어 자체가 굉장히 그 기저에 (부정적인 뭔가가) 있구나. 두영찍에서 감독님들이 다들 멘토링을 받은 경험이 있었어요. 그 영화들이 다들 사적다큐라고 불리게 되는 영화들이었는데, 그 감독님들 또한 자신의 영화가 사적 다큐라는 것을 뭐랄까, 인정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되면서 어떤 (자기검열 등) 뭔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묻고 싶어요. 이 단어가 나쁜 단어가 아니라는 말도 비평하시는 분들과 이야기를 했었어요. 이 단어(사적다큐멘터리)가 나쁜 단어가 아니고, 처음에는 좋은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지금은 왜 이것이 부정적인 뉘앙스로 우리가 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사적다큐로 불리는 상황에 대해서 포기를 하거나 체념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있습니다.

저는 글쓰는 사람들이 이 단어를 잘 캐치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사적다큐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그 단어가 잘 정의되어 있었더라면 ‘내 이야기를 하고 나로부터, 작은 이야기로 시작되는 어떤 이야기이구나’ 하고 생각했을 텐데, (그게 되어있지 않아서) 그렇게 안 좋은 뜻으로, 사회적 문제가 아닌 것을 이야기한 작은 영화라는 의미로 이해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 포럼 이후로는 ‘사적다큐멘터리’라는 단어가 잘 정립이 되어서, 그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감독님이나 평론가, 다른 집행위원 등 영화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이 포럼에 대한 정리된 글을 봐라, 하고 말하고 또 당신이 쓰는 사적다큐멘터리라는 단어가 그렇게 차별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래서 사실 이 자리에 나오는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게(오늘 제시되는 고민들이) 다 제 이야기이거든요. 저는 사적다큐 단어에 대한 쓰임이 혹시 나만 불편한 거면 어쩌지, 하고 검열하게 되는데. 저는 그렇게 제가 저를 검열하게 되는 것부터가 오늘 이야기할 문제들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고,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변성찬 영화평론가 이면서,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이고, 한독협 비평분과에 있는 변성찬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불려나오게 된 배경인 것 같습니다. 1차적으로는 인디다큐집행위원을 하면서 3,4년전에 예심을 했었고 그 때에 일종의 심사평이라기 보다는 심사후기, 심사하면서 제가 갖게된 의문이나 질문같은 것들을 쓴 게 있었고, 그것이 지금 두 감독님들이 말씀하신 체험 속의 한 부분이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또 하나는, 제가 비평분과장을 맡고 있기에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제가 약간 망설인 것은 지금 두 분 감독님께서 신진, 여성, 감독, 이잖아요. 저는 50대, 아저씨, 비평가, 라서 세가지 지점에서 대극점에 있는 사람이고요. (웃음) 한편으로는 제가 여기서 자칫 망신창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고.. 그래도 저같은 위치에 놓인 사람이 한명 있어야 이야기가 풍부해지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을 동시에 가지면서 이 자리에 나오게 됐습니다.

일단 사적다큐에 대해서 말씀을 두분이 하시면서, 처음에는 정말 이해가 안 되었어요. 처음에는. 사적다큐라고 어떤 작품을 이야기하는 것이 왜 폄하의 의미가 되지? 그리고 심지어는 두분 뿐만 아니라 다른 창작자 분들에게도 여러 번 들은 것 같아요. 사적다큐라는 단어를 폐기해야 한다는.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던 거예요. 문제는 영어로 personal, 프라이빗 이라고 표현하는 그 단어가, 영화사 안에서 personal 이라는 수식어가 사용될 때의 제가 가졌던 감정적(담론적?) 체험은 늘 긍정적이었던 것이었거든요, 폄하라기보다는.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는 그래서 뉘앙스의 차이가 분명히 있구나. 이런 것을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이해하게 되었고요. 또 한 가지는 지금 두 감독님께서 제기하신 문제가 사적다큐라는 단어에는 창작과 비평의 관계, 또 독립영화 씬 안에서 선후배 관계, 남성과 여성의 관계라고 하는 일종의 권력관계가 있다. 또 그런 권력관계는 대게의 경우 권력의 상위에 있는 사람은 느끼지 못하고 단순히 차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렇지 못한 항에 있는 분들은 당연히 이걸 차별로 느끼고, 그걸 인정하는 부분에서 출발을 해야 한다고 전제를 드리고요.

그런데 그 문제 자체는 굉장히 길고 섬세한 이야기를 필요로 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제 제가 이해하고 있는 사적다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기준으로 아까 말씀드린 예심과정에서 제가 봤던 작품들에 대한 진단적인 평가를 덧대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일단 사적다큐멘터리라고 하는 표현 또는 그것에 대한 정의에서 대조되는 두 가지를 찾았는데, 하나는 차민철씨가 쓴 『다큐멘터리』라고 하는 책에 나와있는 정의인데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사적다큐멘터리는 역사적 사건이나 정치, 사회적 문제에서부터 가족이나 개인, 경험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즉 소재나 주제면에서 초첨을 맞춘 것이 아니고요. 폭넓은 주제를 담아내면서 현대 다큐멘터리의 가장 두드러진 경향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현대의 다큐멘터리가 역사, 정치,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데에 창작자의 주관적 시선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영화로서의 다큐멘터리는 모두 사적다큐멘터리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현실과 세상에 대한 창작자의 주관적 시선은 물론, 창작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기억, 나아가 창작자 자신을 다큐멘터리 텍스트의 1차 재료로 삼는 작품을 ‘자전적 다큐멘터리’, 불어로는 오토 다큐멘터리, 영어로는 오토 바이오그래피컬 다큐멘터리라고 부를 수 있을건데요. 이런 방식으로 해서 주로 관점이나 어떤 스타일, 이런 퍼스널의 의미를 그렇게 1차적으로 의미부여를 하면서 자전적 다큐멘터리는 그것의(사적다큐멘터리의) 하위 범주로 보는 용례가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오태돈씨가 내린 간략한 정의로, “제작자 자신을 포함, 제작자의 가족이나 제작자와 일상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이 화면 내에 존재하며, 이들을 대결 혹은 통합 형태의 주체로 주제로 하여, 주관적으로 제작되는 다큐멘터리.” 이런 식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관적이라고 하는 것에 방점을 두는 데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오태돈씨도 외국 학자의 정의를 인용한 것인데, 이것을 보면 주로 제작자 자신과 제작자의 주변, 특히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그런 다큐멘터리를 사적다큐멘터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것입니다. 오태돈씨 논문의 영문제목에, 퍼스널이 아니라 오토 바이오그래피라고 표기되어있고 그것이 우리말로는 사적다큐멘터리를 번역해놓은 것이어서 분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걸 쉽게 첫 번째 정의는 창작자의 주관적 시선이나 스타일에 방점이 찍혀있고 두 번째는 다큐멘터리 작업의 대상에 방점이 찍혀있는 정의라고 이렇게 구별을 해 볼 수 는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이중에 어느 것이 더 올바른 것인가는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고요. 오히려 이런 방식의 다른 정의가 나오는 맥락이 저한테는 더 흥미롭습니다. 사실 일부분만 인용을 해 두었지만(자료에) 차민철씨의 정의부분을 보면 주로 유럽중심의 영화사라는 것을 알 수 가 있어요. 두 번째 오태돈씨가 인용한 맥락을 보면 중심적으로 분석되는 영화텍스트를 보면 영미권 다큐멘터리인데. 그 맥락상의 차이가 이런 차이를 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실제로 마이클 레어헌트 라고 하는 다큐멘터리 학자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사적이라는 것이 의미부여되고 방점이 찍힌 전통은 영화사 안에서는 주로 아방가르드와 관련되어서, 특히 정치적 상황이나 매체 환경의 변화에서 뭔가 대안적인 정치성이나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미학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들이 대게 개인적, 사적이라는 태도로 의미부여되고 호명이 된 나름의 전통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16mm가 본격화 되었을 때, 그것에 맞추어서 유명한 아스트뤽 같은 감독이나 비평가는 카메라 글쓰기, 카메라 만년필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가벼워졌으니까, 당시 메인스트림 영화의 문법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마치 만년필로 네가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글로 표현하듯이.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식의 의미부여였고. 그것과 맞물려 있는 영화적 실천이 소위 프랑스에서는 누벨바그, 누보시네마.. 이런 방식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포괄하는 방식의 영화적 흐름으로 나타난 바가 있었고요. 대표적인 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런 의미에서 ‘퍼스널’하다라고 하는 것은 70년대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들어요. 당시 사람들이 쓴 글을 읽어보면, 전통적이거나 관습적인 다큐멘터리에 대한 대안으로 ‘퍼스널’ 한 다큐멘터리를 많이 이야기 하는데. 그때 전통적이거나 관습적이라고 생각하는 다큐멘터리 재현양식으로 그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게 그리어슨이나 다이렉트 시네마의 전통을 갖고 있는 영화들을 지칭하는 건데. 그런 영화들이 갖고 있는 정치적 한계를 언급을 하면서 ‘퍼스널’의 의미를 부여하는. 제가 알고 있는 맥락에서는 이런 식의. 한국의 경우에는 2000년대 초반 디지털이 보급화되면서 비디오 바이오그래피나 이런 게 출현을 했을 때 새로운 영화적 언어의 표본으로 비평적으로 적극적으로 호명된 적이 있었고. 이런 맥락을 볼 때 퍼스널하다라고 하는 것은 늘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이 되어왔어요. 그런데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적다큐멘터리 라는 단어를 재전유해야 한다면 그런 의미로 사용이 될 때, 그런 의미에서 소재나 대상을 중심으로 하는 자전적 다큐멘터리 혹은 가족다큐멘터리와는 구별해서 사용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고요. 하지만 그 두 가지 의미를 계속 넘나들면서, 진동하면서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편의상 저는 자전적이거나 가족다큐멘터리 하고 관점과 스타일에 초점을 둔 사적다큐멘터리. 관점과 스타일에 초점을 둔 사적다큐멘터리의 경우 오늘날의 이론과 비평 담론 안에서는 에세이 필름이라는 형태로 지칭하고 싶어하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을 하고 있는 것 같고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서두에 말씀드렸던, 제가 2년에 걸쳐 신작들을 예심을 하면서 특히 그중에 대부분 신진 감독들이 만든 것으로 짐작이 되는, 단편다큐멘터리에서 나타나는 어떤 경향을 두고 심사 후기를 쓴 적이 있는데. 그때 제가 염두에 뒀던건 자전적이거나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즉 소재나 대상 면에서 자기와 가족에 편중되어 있는, 그런 개별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그런 경향에 대해서 일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썼던거고. 사적다큐멘터리여서 안 된다기 보다는, 진정한 사적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자기나 자기 가족을 찍으면 다 긍정적 의미에서 사적다큐멘터리가 되는 건 아닐 터이고 아까 먼저 하신 감독님 말씀 중에, 작품이 출발점에서는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아이템일순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 제대로 밀고나가고 완결짓기에는 지극히 어려운 게 바로 자신과 자기 가족을 대상으로 찍는 작품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독님들에 따라서는 사실은 그럴 때 할 수 있는 말이, 너 자신이나 가족을 한번 찍어봤어? 라고 거꾸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고요. 실제로 그런 작업을 하는 감독들 중에는 다시는 내가 내 가족을 대상으로 찍지 않으리라, 쉬운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쉽다는 것은 안해본 사람들이 가지는 편견일 수 있고요. 그런 자전적 혹은 가족다큐멘터리라는 의미로 사적다큐멘터리 용어를 쓰자면, 그렇게 쓰면 안 되는 건 아니니까요. 사적다큐멘터리 현황을 말씀드리면 제가 2014,5년 두 해 연속 예심을 해봤었는데 그중에 단편 다큐멘터리의 출품작 중에 40프로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 이야기였어요. 그중에 3,40편에 이르는 상영작중에 2/3는 사적다큐멘터리에요. 그러니까 그 전반적인 두 가지 점, 일단 양적으로 집중되어있는 경향에 대해서 이건 선비평적으로, 왜 다들 가정의 이야기를 쓰지? 1차적으로 이것은 선비평적인 소감이고요. 마치 대중영화 시장 안에서 <아저씨> 이후로 왜 맨날 깡패들 나오고 이런 영화가 흥행이 반복되면 왜 다들 이러는 거야? 이야기가 되는 것과 비슷한.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단편예심을 해보면 그런 경향이 분명히 있거든요. 예를 들면 <추격자>가 대중적으로 성공한 그 다음해 였어요. 단편다큐멘터리의 장르적 경향을 보면 분명히 관련해서 쏠림현상이 있어요. 그랬을 때 그것 자체에 대한 선비평적인 이거 뭐지? 라고 하는 반응적 표현 일 수 있고. 그 다음에 한 가지는 실제로 그런 심사후기를 써놓고 나서, 제가 당황스러웠던 게 뭐냐면 그 심사후기는 제가 절대로 선정할 수 없어서, 선정하지 않은 영화들을 상대로 쓴 거거든요. 그런데 그해 영화씬의 뒤풀이 자리에 가면 가족이야기를 찍은 감독들이 와서, 주뼛거리고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니 그런게 아니다. 실제로 하나의 예를 들면 제가 자기소개서 다큐멘터리라고 이야기했던 건, 마치 대학이나 기업의 자기소개서를 쓰듯이 자기가 친구들하고 해외봉사활동을 이렇게 멋지고 훌륭하게 갔다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찍어서 낸 경우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실제로. 그러니까 예전같으면 솔직히 그렇게 찍어서 낼 수야 있지만 그래도 인디다큐페스티발에는 내지 않는게 상식인데, 그런 영화를 찍었으면. 그런데 그런 작품들이 단편 안에 많아서 그런 문제의식을 가졌던 거고요. 그런데 정작 그것이 특정 감독들에게는 자신을 검열하게 하고, 그렇게 작동했다는 것에 대해서 좀 안타까운 느낌이 있고요. 자신이나 자기 가족을 찍더라도 영화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퍼스널한 이런 것들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아까 말씀드렸던 몇 가지 영화적인 상황 속에 분명히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 때에 더 퍼스널은 사실 인퍼스널한, 비인칭적이거나 삼인칭적인 그런 삶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 작품들이라는 역설이 있고요. 그래서 그것은 소위 말하는 개인주의와는 대척점에 있는 사고 혹은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의미가 있고. 그런데 특히나 마지막으로 사적이라는 말, 사적인 것이 대안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는 말이지만 지금 시대에는 뭔가 한 가지 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까 감독님들은 검열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자기와 자신의 거리 확보 문제.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늘 필요한 어떤 거리확보의 문제, 성찰성과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은 하는데. 사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은 굉장히 심화되고 있어요.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랬을 때에 심지어는 감정자본주의 이런 것에서도 나타나듯이 개인이 자기개발의 주체가 되고 자신의 감정 정서적인 요소까지를 개발하고 상품화하고 이런 것을 위해서 약간의 고통, 치유의 서사가 굉장히 제도화 되어있고 TV를 중심으로 한 매스미디어에서 일종의 레이싱으로 이렇게. 리얼다큐멘터리 쇼가 TV라는 매체에서 이렇게 하나의 주류적인 트렌드를 갖추고 있다는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이제 ‘더 퍼스널’ 사적인 것의 정치성은 바로 그런 레이싱에서 이야기하는 긴장과 대결을 하지 않고서는 이 시대에는 대안성이나 정치성 같은 것을 찾기 어려워진. 사적인 것의 정치성에 대해서 하나의 분명하게 난제같은 것이 작동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역시 세대론적인 차별의 의미가 분명히 담겨있을 수 있는 말이지만, 양쪽으로 자꾸 자기와 자기 가족의 문제가 소재나 주제면에서 일종의 쏠림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저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어떤 기제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이 불안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유일한 안전판이 가족이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런 영화 많거든요. 우리 가족은 왜 이렇게 정상적이지 않은가 하고 호소하는 작품들이 있어요. 그럴 경우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사적다큐멘터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런 맥락에서 그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고요.

한때 MB시절에는요 작품들을 쭉 보면 아까 말한 선비평적인 멘트로서, 왜 맨날 개발, 재개발이야기야 다큐멘터리가.. 이런 이야기를 (웃음) 그것과 비슷한 말을 최근 2,3년전의 경험에서는 가족과 자신을 다룬 작품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란 게 있고. 소재와 대상 면에서 개별 작품의 문제를 떠나서 양적으로 쏠림 현상이 세대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강화되고 있는 현상은 그런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에 담겨있는 정서도 그렇고 표현하는 스타일도 가령 이 친구는 태어나서 본 다큐멘터리가 무한도전밖에 없는 친구구나, 뭐 이런 느낌이 오는 영화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에서 어떤 이념이나 신화로 계속 강조하는 개인주의와 어떻게 구별하는 차원에서 사적인 것의 정치성을 우리가 계속 유지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의 과제로 남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김숙현 안녕하세요. 저는 김숙현이라고 하고요 이전에 사적다큐 <죽은개를 찾아서>(Searching For Dead Dogs , 2010)라고 2010년도 정도에 만들었었는데요. 지금은 또 다른 사적다큐의 경향이 있지 않은가. 정말 많은 사적다큐가 상대적으로 젊은 여성감독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는데 저는 어쨌든 비평가가 아니고 미디어문화를 공부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비평가의 시각이 아닌 여성영화감독들의 사적다큐가 위치한 맥락에 대해서 특히 미디어 중심으로, 그리고 혹은 영화생산 장의 변화를 중심으로 해서 어떻게 보면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좀더 저는 접근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사적다큐멘터리는 무엇인가, 할 때 다양한 논문들을 읽어보긴 했지만 그나마 최근에 스콧 맥도날드가 2013년도에 지금 한창 핫하게 다큐가 제작되고 있는 보스턴 지역에 있는 다큐멘터리를 분석하면서, 어떤 인류학적인 영화와 사적다큐가 어떻게 만나는지 이런 것을 분석한 책을 참고로 하다 보니까 사적다큐에 대한 정의가 있었고, 제가 최근에 봤던 사적다큐들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에 오히려 이 정의가 적합하다, 받아들일 만 하다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을 보면 이제 사적다큐멘터리란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 혹은 가족의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어떤, 느슨하게 설명이 되어있죠. (PPT보며 설명중) 감독과 상호작용하는 가족과 친구와 타인들, 그러니까 사실은 감독이 중심이 되어서 감독의 삶이나 주변 삶에 대해서 묘사하고 탐구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스콧 맥도날드가 자전적인 다큐와 다를바가 없다. 사실 교환가능한 언어로 사용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최근에 본 다큐들이 그런 경향 아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정의가 적합하다고 생각을 했고요. 사실 우리가 사적다큐멘터리라고 하면 몇 가지 역사적인 맥락들이 있죠. 사실 시네마 베리떼라는 양식이 나오면서 등장을 할수 있었던 것이고, 그건 어떤 감독의 촉매제 역할을 하면서 그 안에서 적극적인 과정에 참여하는 것들이 다큐멘터리화 된다는 거겠죠. 그 안에서 이제 함께 어떤 감독이 관찰한 실제적 경험을 주관적이고 객관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게 중요한 것이고, 또는 아까 변성찬 평론가님께서 강조했던 것은 사적다큐멘터리의 역사적인 의의, 맥락이라는 것이 사실 소수자의 의견들, 목소리를 되돌려주는 역할과 그리고 거대서사에 대한 저항적인 맥락들. 분명 이런 것들이 정치적인 의미가 있던 시절이 있었죠. 그리고 그 의미 안에서는 어떤 주체와 대상간의 권력도 분산한다는 의미까지 포함되어있는데, 물론 지금 현재 2017년 한국의 사적다큐가 이런 경향, 맥락, 정치적인 의미를 가져가고 있는가 그것은 정말 질문해야 할 상황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지금 맥락 안에서 저는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 1인 미디어시대 안에서 미디어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해요. 각자 영화감독들의 미디어경험들이 녹아져있다고 생각을 하고, 아까 변성찬 평론가님이 이야기했던 다큐멘터리를 경험한건 무한도전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사실 그런 어떤 캐릭터화 하는 것 있잖아요. 이게 ‘리얼’인가? 이게 이 사람의 퍼스널낼리티인가? 근데 저는 어떤 최근의 다큐멘터리 감독들도 자기 패러디 하고, 카메라의 위치를 정하고, 카메라 앞에서 어떤 평면적인 위치를 점하고.. 그런 것들이 다 미디어 속의 경험들이 포함되어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다큐멘터리 미학이 미디어적인 발전과 함께 변화해 왔다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콜슨의 양식에 대해서 막 이야기할 때 그런것들이 지금의 사적다큐의 경향과 맞아떨어지느냐, 저는 사실 모르겠어요. 그랬을 때 오히려 디지털이 일상화 되고 미디어의 경험이 체화되는 것들, 그리고 어떤 다큐멘터리가 확장되고 변형될 때 쇼가 되든, 오락이 되든, 룩이 되든, 스타일이 되든 그런것들이 어떤식으로 다큐멘터리가 개방되고 확장되었을 때 생산자가 그것을 수용했는지 그런것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영화에 반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카메라가 좀 인격화되었다, 위치를 놓고 이런 것들을 분석하는게 재미있겠다, 물론 그런 것들을 제가 분석해보진 않았지만. 수용자들도 다큐멘터리를 이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진 않아요. 이제 일요일에 보는 동물농장? 이런 데에도 보면 다큐멘터리인데 엔터테인먼트 되어있고, 거기에 내러티브가 있고. 카메라 위치가 저기에 있었겠네, 뭐 이런 것들. 그리고 매체 관련성이라고 하면 수많은 VJ들이 직접 티브이 화면에 나온단 말이죠. 이제는 다큐멘터리를 이제 과거의 다큐멘터리 양식처럼 분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요.

아까는 미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면 한국독립영화의 장에서 다큐멘터리의 변화.. 80년대에 액티비즘 기반의 다큐멘터리 미학이 지금도 한국 고유의 중요한 미학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계속 변화해 오고 있죠. 그리고 90년대 2000년대 되면서 본격적으로 어떤 다큐멘터리가 영화로써 인정을 받기 시작했죠. 그 이전에는 사실은 영화라는 어떤 자기 매체적인 성찰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이 들고요. 90년대 2000년대 들어오면서 영화로서 받아들이게 되고, 특히 중요한 것은 제도화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성찰적인 소재, 다양한 소재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여성 다큐멘터리인들도 등장을 하죠. 그래서 90년대 중후반에 본격화되고, 2000년대 되어서 여성 다큐멘터리인들이 비약적으로 증가를 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소중한 이미지들과 역사적인 결과물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 맥락 안에 역사적인 후임자로서 신진 여성 다큐멘터리인들이 있다고 맥락화를 하고 넘어가고 싶고요.

중요한 것은 생산자가 변화했다는 것. 어떻게 보면 제도화 되면서 다큐멘터리 만들기가 학교 교육 과정 커리큘럼에도 있고 제가 얼마전에 이렇게 사적다큐가 늘어나는것에 있어서는 수업시간에 너의 첫 영화는 가족부터 찍어봐라, 라는 어떤 미션을 받기도 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런 부분을 제도적 차원에서 무시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교육받은 젊은 여성들이 어떤 언어로서 사적다큐멘터리를 많이 가져온다. 그랬을 땐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미디어를 일상적인 체화해서 항상 자신과 함께하는 어떤 미디어. 이전에 2000년대 초반에 카메라를 뻗쳐놓고 나는 이 카메라 앞에 섰다, 라는 엄청난 거리감.. 과 다른 방식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거죠. 감각이 달라진 거죠 미디어에 대한 감각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 변화해 온 것이고 그런 가운데에서 저는 제가 이 12편의 다큐멘터리를 봤는데요. (<그날>, <개의 역사>, <버블 패밀리>, <못, 함께하는> 등) 다큐멘터리 안에서 어쨌든 자신을 스스로 메타포화. 현재 젊은 여성 감독으로서 자신을 이미지화 하고, 적극적으로 이미지의 재생산에 참여하면서 맥락화 하는, 그런 적극적인 자의식적인 발화라고 봤습니다. 물론 거기엔 다양한 문제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표현의 양식들도 분명 미숙할수도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질적인 평가는 이루어질수도 있지만 표현적인 양식들이 다양하게 있었다고 생각을 하고, 중요하게는 결국 ‘나’라는 지점에 대한 탐구의 영화로서 영화들이 보여졌어요. 사적다큐가 왜 이렇게 이상한 언어로서 사용되나요? 하는, 우리가 맨 처음 이 포럼을 하기 위해 만났을 때 그런 문제의식이 있었듯이 저는 이런 맥락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기술도 변화하고 있고, 존재론에 대한 생각도 다르고, 미학적인 개념도 다르고, 생산환경, 수용하는 환경 그런것들이 대중들이 보는 생각, 그리고 어떤 학자들 전문가들이 보는 생각이 사실 서로서로 어긋나있다, 그래서 그런 속도감들이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 것들 안에서 사적다큐가 모호한 위치에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구요, 우리가 공적, 사적이라고 말하는 대표적인 어떤.. 페미니즘에서도 계속 이야기 해왔지만 그런 이분화된 위계질서라는 것이 있고 그 사적이라는 어떤 하위범주에 속하는 그것 안에 여성이 결함되면서 약간, 저평가 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봤던 12편의 작업들은 두영찍에 소속되었던 여성감독들님들과 이번에 DMZ에서 소개되었던 작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소개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요하기 때문에, 러프하게 어떤 경향이 있다 정도만 했고요. 스틸컷 같은 것도 그냥 스크린샷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했기 때문에 미흡한 점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텍스트의 성격이라는 것은, 그 이전에 2000년대 초반은 카메라 앞에 있는 ‘나’의 수행성이 되게 강조가 되었다면 물론 지금도 그게 강조가 됩니다. 그런데 카메라 자체의 수행성도 있어보였거든요. 가령 카메라를 이렇게 두었을 때 카메라가 덜그덕 거린다, 그러면 이게 리얼리티야. 이제 카메라가 RAB 버튼이 눌러졌어 하는, 카메라 자체가 퍼포밍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전의 매체 반영성, 어떤 양식적인 것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거야 하면서 이건 지금 다큐멘터리이지. 하고 이야기해주는 퍼포밍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사적다큐가 사실은 일반적으로 찍고 있는 나를 찍는다, 하는. 나르시즘의 경향을 완벽하게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런데 그랬을 때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고 있는, 그런 장면들도 꽤 많이 등장을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런 부분이 특징적이라고 생각을 했고,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거기에 체화되어 있는 나, 그래서 어떤 감독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찾는 부분이 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감독인 나’에서 조금 벗어나서 세계 안에서의 나, 나의 존재에 대해서 좀더 질문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것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어떻게 컨트롤 할것인가에 대한 긴장감도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 다음 화면을 보시면, 서로 비슷한 화면들이 서로 다른 영화들에서 많이 등장을 하죠. 카메라를 저기 가져다 놓고 나를 퍼포밍하기도 하고, 카메라가 움직이는 그 자체를 보여주기도 하는. 그래서 이제 이런것들이 비평적으로 정말, 비슷한 카메라 배치와 움직임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화면에서 편집하고 있는 나, 카메라로 찍고 있는 나, 그래서 가끔 카메라와 눈도 맞추지게 되는. 그게 사실 현실 안으로 들어와서 다큐멘터리성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런 장면들이 꽤 많이 등장하게 되더라고요. 다음 화면도 그런 방식이고, 또한 미디어를 체화하는 방식들을 보면 <가현이들>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못, 함께하는> 에서도 보였고. 사실은 되게 카메라를 가지고 논다, 플레잉을 한다는 느낌이 많이 들죠. 그래서 카메라를 서로 주고받기 하는 과정들, 이런것도 특징적인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슷한 화면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게 재밌죠. 또 다른 미디어를 거쳐서 매개하는 방식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도 어떤, 미디어에 익숙한 세대의 영상화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으로 넘어가서, 그래서 결국에는 어떤 서사가 담기느냐. 공통적인 부분이 저같은 경우는 제가 발견한 네 가지의 특징은. 1. 관계의 회복을 위한 화해와 협상의 과정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 같았고요. 2. 가족이나 친구들이 등장하지만 서로 상호비판하는 과정, 관계성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분절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었고 4. 함께 성장하고 치유해 나간다는 것. 저는 이 네가지가 공통적인 서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이 부분들이 더 분석되었을 때 사적다큐멘터리가 갖는 의미라는 것도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음 화면들도 보면, 가족들과 함께 있고 그런 부분들이 가족들이 계속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걸고 그러면서 서로 상호 이야기를 하는 그런 관계를 풀어나가는 것들이 큰 특징이죠. 그리고 가족들 역시 카메라 앞에서 수행을 하고, 그 수행의 과정에서 서로 치유를 하거나 서로 협력을 하거나, 화해를 하거나.. 그런 다양한 과정들이 담기는 거죠.

그래서 이런 현재 사적다큐가 갖고 있는 가치라는 게 수용자들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가치가 큰 것 같거든요. 텍스트 자체는 물론 서사나 양식적인 분석을 해볼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지금 현재에 관객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 것이냐, 그 관객을 형성해 나가고 어떠한 방식으로 연대를 보일 것이냐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해보거나, 뭔가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황미요조 안녕하세요. 저는 영화에 대한 공부를 하고, 강의도 하고 글도 쓰는 황미요조라고 합니다. 저도 사실 고민하면서 제가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이 사적다큐멘터리에서 사적이라는 것의 거리가, 저희가 주 텍스트로 삼고 있는 영화들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에 대한 고민이었어요. 저는 페미니즘적인 입장에서 접근을 한 것이었는데. 동시에 저는 방금 감독님이 이야기 하셨던, 동시대에 어떤 카메라의 관계 안에서 그런 문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큐멘터리의 역사에서 이른바 사적다큐 혹은 자전적 다큐멘터리 양식이라는 것이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방식으로 등장했던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씀들을 하셨으므로 다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이번 포럼에서 논의할 다큐멘터리들은 그런 미학적 야심이나 의도가 잘 관찰되지 않는 다큐멘터리들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그런 미학적 구조들을 의도하고 완성하는 것을 애써 피하려 하거나 겸연쩍어 하며 망설이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영화가 어정쩡해보이게 하는 그런 태도가 발견이 됩니다. 그래서 이 망설이거나 어정쩡한 태도를, 세대와 젠더적 미학적인 특징으로 문제화 할 수 있을까, 이런 태도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것이 다큐멘터리 개념에 어떤 질문들을 던지고 있을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가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게요. <가현이들>에는 감독이 화자로서, 그리고 알바노조의 가현이들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사적다큐멘터리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바노조 혹은 알바노동이라는, 흔히 사적이다는 소재와는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사회적 소재 역시 이 영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사적다큐멘터리인 한편 노동운동 다큐멘터리라고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아까 윤가현 감독님께서 처음에 이 다큐멘터리가 사적다큐멘터리로 규정되는 것에 당혹감이나,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셨는데 사실 이 다큐멘터리가 그렇다면 노동운동 다큐멘터리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도 저는 쉽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노동운동 다큐멘터리 혹은 노동운동 서사와 불화하고 있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그것은 알바노동이라는 노동의 성격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투쟁의 장면에서 우리가 흔히, 관습적으로 인지되는 방식으로 찍히지 않았어요. 다들 구호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가현씨는 구호를 하지 않고 물끄러미 비정규직 노동자를 쳐다보고 있는 순간을 윤가현 감독님은 굳이 다큐멘터리에 넣은거죠. 심지어는 프레임에서 두 번 정도 빠졌다가 이가현씨가, 그리고 나서 윤가현 감독 본인이 직접 보이스오버를 하는데, 해고는 살인이라며 하늘위로 올라간 노동자, 해고가 익숙한 우리. 나는 우리가 땅을 밟고 서 있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라는 보이스 오버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걸 언뜻 들으면 비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있는 알바노동자, 라는 뜻으로 언뜻 들리기는 해요. 그렇지만 저는 동시에 알바노동은 평생고용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이 아닌거죠. 그래서 고정된 계급성이나 노동자성이 알바노동의 정체성이 되기에는 무리가 있거나 혹은 그런 고정된 노동자성이나 계급성이 알바노동을 확장하려는 노력들이 있지만, 그 사이에 불화가 되는 지점들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영화들에서는 그 부분들이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아요. 왜냐면 이 영화들이 그 지점들을 기존 노동운동의 서사에 이 알바노동이 어떻게 교차 혹은 배열되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아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저는 오히려 이 다큐멘터리에서 여러 번 투쟁현장들이 나오지만 현장들을 극적이거나 차별화해서 어떤 구체적인 요구들을 하는 현장인지, 아닌지가 나온다기 보다는 평면적으로 배열되고 있는 이 부분 자체가 사실은 알바노동이라는 것과 기존의 노동운동의 서사, 혹은 노동다큐멘터리가 겪고 있는 불화의 자리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것을 벗어난다고 말하지 않고, 불화하고 있다는 표현을 쓴 것은 이 영화는 오히려 그런 불화지점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자신 혹은 알바노동자, 지금 세대의 문제, 경쟁적이고 불안정한 지위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참조틀 자체가 기존의 노동운동이나 노동다큐멘터리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참조점을 받아들이면서 등장하는 불화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저는 만약에 이 영화가 어떤 의미에서 노동다큐인지가 애매하다, 사적다큐인지가 애매하다,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런 불화에서 나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버블 패밀리>(Family in the Bubble , 2017)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감독 가정 개인의 부동산 투자로 인한 경제적인 호시절과 우리 사회사가 동기화되어 맞물리는 방식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이것이 티비, 신문, 개인 홈비디오 촬영 등 과거 자료들과 인터뷰, 보이스오버로 구성되어 있다면 이것을 함축하면서 현재적 이미지로 평행적으로 배치되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이 이 월드타워의 이미지입니다. 이 월드타워의 이미지는 영화 초반부터 계속 간헐적으로 등장을 하고 있어요. 동시에 완성되어 가는 중에 등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등장을 하면서도 계속 점점 높아지는 모습으로 등장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이 과거 자료라든지 인터뷰라든지 이런 것들이 이미 언어화된 자료로 표현이 된다면, 이 월드타워는 서민의 손을 떠나버린 개발의 꿈을, 혹은 버블의 꿈을 압축화해서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였습니다. 이 월드타워가 계속 등장하다가 영화의 중간에 갑자기 사라져버려요. 그리고 감독의 가족의 경제적 삶의 흥망성쇠와 한국사를 이렇게 병치해서 버블경제사를 병치했던 구성도 중간에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후반부는 알지 못했던 아버지 소유의 땅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의 빚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감독의 어머니가 감독 앞으로 땅을 사놓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으로 채워져 있고 마무리는 가족들이 가족사진을 찍으러 가고, 외식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가족의 몰락을 사회적인,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했던 시도는 가족안의 화해 또는 경제적인 안도로 마무리되는데요. 이 영화는 공적인 시간과 사적인 시간이 동기화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 다큐멘터리로 보여졌지만, 최종적으로는 그 동기화를 실패시키고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왜 이런 구성이 이 영화에 맞다고 생각을 했을까? 마지막으로 최종적으로 완성된 월드타워와 당시의 도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엄마가 자기 앞으로 사놓은 땅을 보러가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게 왜 맞다고 생각했을까에 대해 궁금증이 들었어요.

김보람 감독님의 <개의 역사>(Baek-gu , 2017)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면, <개의 역사>는 영화 내에서 나의 모습이 매우 위태로우면서도 끈질기게 출현합니다. 열 세번째 이사를 했다는 자막으로 이 영화의 화자가 감독자신이라는 것을 매우 분명히 하고 시작을 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한참동안 진행되는 가운데 감독은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습니다. 다만 후암동과 후암동의 사람들, 동물들과 마을 풍경들을 다룬 동안에 감독이 크게 부각되진 않지만 인터뷰에서 인터뷰 대상자의 질문들만 나열되어도 되는 장면에, 굳이 거기서 감독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저는 개를 찍고 있어요라든지 이런 식으로 인터뷰 대상들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장면 등을 목소리로 등장시키는 거죠. 결국 이 영화에서는 재개발중인 공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찍는, 그것을 찍고 싶어하는 감독자신이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찍고 싶어하는 자기가 주제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감독 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영화의 마무리를 10분정도 남겨두고서 인데요. 백구를 관찰하는 이야기를 쭉 감독 나레이션으로 넣은 다음에 ‘개의 역사’라는 자막이 뜨고, 영화가 한번 마무리된 것 같은 생각이 들죠. 그 이후에 감독 자신의 가족이야기를 영화의 마무리에 풀어놓게 됩니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맨 앞에 나왔던 바람에 흔들리는 울창한 나무숲입니다. 마치 마무리는 이 이야기는 그래도 내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더 확장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어하면서 마무리하는 것 같습니다.

정수은 감독님의 <그날> 같은 경우에도, 외할아버지와 분단의 아픔이 중심 이야기가 되지만 감독이 화자로서 등장을 하는데요. 이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하는 전달자라기 보다는 이 영화에서의 한 명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본인이 등장하는 장면을 주로 엄마와의 갈등 관계로 등장을 하게 되는데요. 이 역시 여기서도 감독이 소재의 전달이라든지 취재 대상중의 한명인지, ‘나’라는 정체성이 중요한 것인지 그런 부분들이 분명하지 않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아, 시간이. 그럼 제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들에서 보이는 어정쩡한 문제라든지 애매한 태도의 문제들은 사실은 사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이의 거리감의 설정의 어려움과 관련이 있다고도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 저희가 다큐멘터리 역사에서의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부분을 이야기 하였는데, 그것은 일반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 놓여있을 때 사적인 것이 하나의 도전으로 등장하게 되는거잖아요. 그런데 여성감독들은 그 사이에서 사적인것과 자신의 거리감을 가늠하기에 사실은 상당히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이 사적인 다큐멘터리들이 거리설정을 어려워하면서, 자신의 이야기가 오히려 사적인 것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공적인 것과 어떤 접점으로 가져가야하는지, 어떤 거리를 설정해야 하나를 고민하는 결과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반대인거죠. 이 다큐멘터리들이 사적인 것으로 등장해서 도전적인 의미를 가진다기 보다는, 오히려 내 이야기들을 어떻게 공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혹 그랬을 때 이 여성감독들에게 어떤 사회적인, 공적인 것으로가 되었든 아니면 기존 다큐멘터리의 화법이나 서사의 문제가 되었든 그것들이 어떤 방법으로, 들어오게 되는가에 대한 문제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공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사적인 것들이 영화전반에 실려 있으면서도 망설이거나 겸연쩍어하는 태도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관계설정은 동시대 다큐멘터리들을 비롯한 매체와의 관계설정도 영향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이 관계설정과 거리감의 문제는 여성 다큐멘터리스트들에게 훨씬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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