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과 난민을 바라보는 4가지 시선

2017.09.18

내전과 난민을 바라보는 4가지 시선:
9th 난민영화 프리뷰

은혜 시민에디터

 

제9회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지난 16일 다큐&뮤직콘서트가 열렸다. 난민지원네트워크와의 공동주최로 열린 이 토크콘서트에서는 올해 초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다큐멘터리상을 받은 <화이트 헬멧 : 시리아 민방위대>(WHITE HELMETS , 2016)가 상영되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은 인류를 살리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폭격당한 건물 잔해 속에 뛰어드는 평범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시리아의 참상을 확인할 수 있었고, 나아가 왜 시리아를 비롯한 많은 내전국가의 난민들이 필사적으로 국경을 넘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폭격이 일상이 된 분쟁지역만 벗어나면 지옥은 끝나는 것일까. 국경을 넘는 일, 난민으로 받아들여지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 운 좋게 난민 지위를 얻은 경우 그곳에서 사회구성원으로 정착하는 일. 이 모든 과정은 경우에 따라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며, 실제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하다. 올해 DMZ국제다큐영화제에는 내전과 난민이라는 이 복잡다단한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신선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작품들이 준비되어있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이 아니라, 단지 인도적인 차원에서 안타까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세계시민으로서 작금의 난민 사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을 천천히 곱씹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영상으로 쓴 시(詩) <시멘트의 맛>과 치열한 르포르타주 <워쇼>

(Taste of Cement , 2017)

<시멘트의 맛>(Taste of Cement , 2017)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고향을 떠나 레바논에서 고층빌딩을 짓고 있는 시리아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묵묵히 담아낸다. 건설현장은 레바논의 수도인 해안도시 베이루트. 내레이터는 어린 시절 그림으로 처음 접했던 바다 풍경을 떠올린다. 재외노동자였던 아버지가 베이루트에서 사온 그림에는 넘실대는 파도와 흔들리는 야자수가 있었고, 그 풍경은 그림이었지만 너무나 생생하고 신선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리아 건설노동자들의 출근 모습. 공사현장 지하에서 생활하는 그들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출근하고, 시리아 망명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되는 19시 통금으로 인해 꼼짝없이 다시 지하로 퇴근한다. 이제 어른이 되어 고개만 들면 수평선을 감상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망명노동자인 그들에게 바다는 여전히 그림과 다를 게 없다. 이처럼 감독은 시원하고 촉촉한 바다의 이미지와 건조하고 텁텁한 시멘트의 이미지를 대비시켜 시리아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서정적으로 포착해낸다. 이 영화에서 이미지가 밑그림이라면 색감을 입히는 것은 소리인데, 감독은 보이스가 아닌 사운드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대화(dialogue)가 전혀 나오지 않으며, 시를 낭송하듯 읖조리는 내레이션과 뉴스클립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전부다. 대신 감독은 공사장의 소음(특히 공사장비가 내는 굉음)과 의도적인 묵음 사이의 낙차를 적극 활용한다. 이렇게 소음과 묵음의 대조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리듬은, 조금씩 영화에 적응해가던 관객의 의식에 제동을 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대비는 건설작업과 탱크포격의 교차, 잠을 청하는 시리아노동자와 폭격장면의 오버랩이다. 그중에서도 타워크레인 시점쇼트로 보여주는 ‘재건된 베이루트’와 탱크 시점쇼트로 보여주는 ‘파괴된 시리아마을’은 압도적인데, 마치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악몽처럼 교차되고 있다.

<워쇼>(The War Show , 2016)

문학에 빗대었을 때 <시멘트의 맛>이 한 편의 시와 같다면, <워쇼>(The War Show , 2016)는 르포르타주 혹은 자전소설 같은 다큐라 할 수 있다. 라디오 DJ를 하던 감독이 시리아 땅에 당도한 ‘아랍의 봄’을 카메라로 기록하면서 시작되는 이 작품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에 총 7개의 챕터(혁명-억압-저항-포위-기억-최전선-극단주의)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화이트 헬멧>과 <시멘트의 맛>이 시리아 안팎의 근황을 조명하고 있다면, <워쇼>는 어떻게 화이트 헬멧과 망명노동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일종의 프리퀄 기능을 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각 챕터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독재정권 퇴진운동에서 혁명세력의 분열을 거쳐 극단주의자들의 발흥에 이르는 시리아 내전의 속사정을 담아낸 다큐이자, 시리아를 달구었던 민주화의 열망이 어떻게 좌절되고 굴절되어갔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패배의 기록이다. 또한 이 영화에는 자유와 평화를 꿈꾸는 시리아 젊은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시리아의 힙스터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리버럴’하고 ‘아나키’한 감독의 단짝친구들은 혁명과 반혁명의 각축 속에서 점점 생기를 잃어간다. 결국 몇몇은 모진 고문으로 목숨을 잃고, 감독을 포함한 나머지 친구들은 그 상흔을 안고 살아간다. 특히 시리아 군부의 발포, 고문, 조작방송 등은 우리의 역사적 상처인 신군부의 광주항쟁 진압을 연상시킨다. “누가 전쟁(war)이라는 극장에서 이 쇼(show)를 끝낼 것인가.” 감독의 이 물음은, 답을 찾기 어렵다고 해서 질문을 멈출 수는 없지 않느냐고 우리에게 반문하는 듯하다.

저릿한 심리극 <당신들의 천국>과 따뜻한 동화 <아마드의 머리카락>

<당신들의 천국>(Stranger in Paradise , 2016)

이제 시리아에서 유럽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당신들의 천국>(Stranger in Paradise , 2016)은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세계 각지의 난민들이 모여드는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 총 3막으로 구성된 이 다큐는 실험카메라를 연상시키는 앵글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감독은 먼저 5분가량의 프롤로그에서 아카이브 푸티지(archival footage)를 통해 문명의 발달과 인류의 진보를 보여준 후, 이른바 문명사회인 유럽에 대한 성찰을 일종의 소시오드라마 형식으로 시도한다. 한 유럽인 심사관이 시칠리아행 비행기에 오르고, 시칠리아에는 이주를 원하는 비유럽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심사관은 그들에게 이주민 수용 현황을 설명하는데, 1막과 2막을 통해 두 가지 버전이 제시된다. 1막에서는 심사관이 이주민으로 인한 막대한 재정지출, 종교적 갈등에 대한 우려, 이상주의자들과 좌파들의 무책임한 선동 등을 강경한 어조로 피력한다. 반면 2막에서는 동일한 심사관이 식민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유럽인의 책임의식을 언급하며 비유럽 이주민들과 유럽(인)의 상호의존성을 천명한다. 3막에 이르면 역시 동일한 심사관이 규칙에 따라 이주 허가 합격자를 선발하는데, 신청자 개개인의 사정을 청취하는 일대일 인터뷰와 규칙의 심급에 따라 불합격자를 호명하는 모습은 서바이벌 TV쇼를 방불케 한다. 또한 다큐촬영이 종료된 것으로 설정된 에필로그는, 이제까지 은근했던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도발적인 마무리이다.

<아마드의 머리카락>(Ahmad’s Hair , 2016)

<당신들의 천국>이 성찰을 위해 의도적으로 픽션을 가미한 다큐라면, <아마드의 머리카락>(Ahmad’s Hair , 2016)은 참혹한 현실 때문에 도리어 픽션처럼 느껴지는 훈훈한 다큐다. 가족과 함께 시리아를 빠져나와 네덜란드에 정착한 아마드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한 소년이다. 영화는 미용실을 찾은 아마드의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마드는 미용사에게 머리카락을 기부하고 싶은데 얼마나 길어야 하냐고 묻는다. 자신과 가족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네덜란드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환아용 가발의 재료로 기부하려는 것이다. 최소 기준인 30cm에 못 미친 아마드는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그때부터 다달이 머리카락 길이를 확인한다. 아마드는 머리카락 기부를 생각해낼 만큼 기특한 아이이기도 하지만, 머리카락 기르는 것이 영 지겹고 귀찮은 평범한 아이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善)의 평범성’은 한 사회에 정착하고자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여야 하는 기존 주민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다. 대단한 결의나 엄청난 희생이 아닌,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담백함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찾는 성실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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